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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9——————== “후작 각하께서도 잘 아시겠지만, 제가 본디 이곳 사람은 아니라 인맥이 그리 넓지는 않습니다.
그저 몇몇 분의 귀족 분들과 연을 맺고 있는게 전부입니다.”
“제발 부탁입니다. 이대로라면 제가 데려온 친구들도 모두 한 달을 버티지 못할 겁니다.”
“그럼 우선 저와 같은 동향 사람이라도 쓰시렵니까?”
“맞다! 그렇지! 백작님 고향 사람들은 일반 평민들도 꽤나 고등 교육을 받았다고 했었죠?”
“모든 나라가 그렇지는 않습니다만, 적어도 제가 살던 나라에서는 그랬습니다.”
“그럼 부탁 좀 드리겠습니다.
대단한 관직을 내려주지는 못해도, 그래도 급여라도 넉넉히 챙겨주겠습니다.”
어차피 고위 관료를 원하는 것도 아니었다.
위에서 계획한 것을 착실하고 꼼꼼하게 처리할 능력만 있으면 된다.
그리고 적당한 계산 능력도 있으면 금상첨화이다.
그런 인재라면 정말 발에 차이는 것이 지구 출신의 난민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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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해서 예상치 못하게, 네메아의 하급 관료들은 지구에서 온 난민 출신들로 채워지게 되었다.
사실 후작만이 정신 없이 바쁜 것은 아니었다.
네메아 군부의 독보적인 실권자가 되어버린 해레이스는 새로 시작될 전쟁의 준비 때문에 바빴다.
그의 당면 목표는 십만에 달하는 황자군을 확장하고 개편해서 적어도 세 배 이상으로 늘리는 것이었다.
병사들을 확충하는 일 자체는 그리 어렵지만은 않았다.
이제 황좌의 주인이 바뀌었으니, 네메아 각지의 귀족들은 알아서 황자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더군다나 황자는 지금까지 자신이 아닌 황제의 편을 들었던 네메아 귀족들을 사면하기로 약속했으니 그들로서도 더이상 싸움을 계속 해야할 이유는 없었다.
그리고 사면의 대가로 각 귀족들은 이 비상 시기가 끝날 때까지 제국군에 복무할 것을 명령 받았다.
물론 그동안 황제에 반기를 들었던 귀족들도 자원해서 제국군에 합류했다.
황자가 지난 수백년 동안의 그 어떤 황제보다 더 큰 권위와 영향력을 가지고 있으니, 귀족의 입장에서는 제국군에 투신할 이유가 충분했다.
덕분에 아레오폴리스 외각에는 네메아 각지에서 각 귀족들이 끌고온 병사들로 가득했다.
문제는 그 수많은 귀족들과 부대들을 적절하게 배치하는 일이었다.
내전 동안 귀족들은 이리 저리 갈라져 서로를 향해 칼을 휘둘러왔다.
당연히 서로간에 얼굴을 붉혀야만할 상황이 적지 않았다.
그렇다고 내전 중에 한패였던 귀족들을 다시 같은 그룹으로 묶어 놓을 수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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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되면 이제 갓 창설된 제국군은 몇 개의 파벌로 나뉘어 엉망진창이 되어버릴 것이 틀림없기 때문이다.
물론 쉬운 방법은 있었다.
전통적인 방식으로 각 귀족들이 각자가 끌고온 부하들을 지휘하도록 하고, 각 귀족들은 적당히 느슨한 연합 관계를 이루는 것이다.
하지만 새로운 제국군에 그런 구시대적인 귀족 연합군은 더이상 허용할 수 없었다.
그러한 귀족의 연합군은 막상 적군을 만났을 때, 제대로 된 지휘 체계가 없어서 서로 편한대로 작전을 펼치다가 운이 좋은 귀족은 승리를 맛보고, 운이 나쁜 쪽은 궤멸하기 일쑤였다.
지금까지
네메아 주변의 강대국들은 이미 군대를 군단 단위로 나눈 편제를 사용하고 있었지만, 황제의 권한이 약한 네메아는 아직도 귀족 연합군 체제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런 강대국들과 상대하기 위해서는 네메아 제국군도 군제를 개편해야 했다.
해레이스는 제국군을 몇 개의 군단으로 나누면서, 각 귀족들의 상관 관계를 파악하고, 누구를 상관으로 놓고 누구를 휘하에 놓을지에 대해 수도 없이 고민해야 했다.
덕분에 가끔씩 그를 만날 때면 그의 얼굴이 히티어스 후작 못지 않게 피로에 찌들어 있는 모습을 볼 수 밖에 없었다.
“이거야 차라리 전쟁을 치루는게 훨씬 더 쉽겠습니다.”
하루가 멀다하고 말싸움을 벌이고, 주먹 다짐을 하고, 심지어 칼질까지도 심심치 않게 벌어지는 귀족 장교들의 꼬라지에 해레이스는 지쳐가고 있었다.
하지만 달리 관리의 달인이라고 불리우게 될 명장이 아닌지, 천천히 제국군은 체계가 잡혀가고 있었다.
“우선 두 개의 군단으로 편성했습니다.
사실 좀 더 나누는 편이 좋겠지만, 당장은 마땅한 사령관을 찾을 수 없으니 어쩔 수 없습니다.”
네메아 궁을 가루로 만든 여파 때문에, 극심한 인재난은 여기서도 생겨난다.
황제의 관료들 중에는 사실 군에서 더 뛰어난 활약을 보여줄 인재도 몇 있었다.
내가 개입하지 않은 미래에 황제의 아래에서 병사들을 이끌며 동부 대륙을 정복하는데 큰 활약을 보여주게 되었을 네 명의 장군 중에 두 사람이 이번에는 별 역할도 하지 못하고 황제와 함께 궁에 머무르다가 참변을 당했다.
내심 난 황제를 몰아낸 후 그자들을 등용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황자의 죽음으로 그런 일에 신경을 쓸 여력이 없었다.
당장 급한 것은 황제의 죽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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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남아있는 한 황자로 위장한 황녀의 정체가 밝혀지는 것은 끔찍한 결과를 초래할 것이기 때문이다.
황녀가 남자를 가장하는 것도 아직 어린 요 몇 년 뿐이다.
평범치 않은 외모를 지닌 그녀는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그 아름다움 때문에 뭇 사람들의 의혹을 받게될 것이다.
아니 지금 당장도 그녀를 지나치는 많은 사람들이 황자의 미모에 놀라움을 표시하고 있다.
만일 황제가 살아있다면, 여자인 그녀를 지지해줄 귀족은 아무도 없다.
난 한 시라도 빨리 황제와 그 혈육들을 모두 제거해야만 했다.
그리고 귀족들이 살아남은 것이 엘리엇이 아니라 클라우디아라는 사실을 알아도 그녀의 편을 들어줄 수 밖에 없도록 만들어야만 했다.
“두 분 많이 바쁘신가 보군요.”
해레이스와 잠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아그니스가 찾아왔다.
“아아. 이야기는 다 끝났다. 백작님을 만나러 온 것 같은데 난 자리를 피해주지.”
해레이스는 내게 인사를 하고 바로 진지로 돌아갔다.
“어서오십시오. 공녀님. 어쩐일로 여기까지 친히 발걸음을 하셨습니까?”
“백작님이 보고 싶어서죠. 당연한 거 아닌가요?
잠시 시간을 내 주실 수 있으세요?”
“공녀님께서 원하신다면 언제라도 그리해야죠.”
우리는 새로운 황궁을 건설하기 위해 잔해를 치우느라 바쁜 옛 궁성의 터 주변을 따라 걸었다.
“아레오폴리스는 무척 아름다운 도시였어요.
제가 기억하는 어떤 도시도 이 오래된 도시만큼 감명 깊지는 못했었죠.”

거의 수십 미터나 파여있는 거대한 구덩이는 그런 아름다운 건축물이 있던 곳이라는 작은 흔적조차 남겨놓지 않았다.
“이 도시에 추억이 많으신가 보군요?”
“그렇게 많지는 않아요.
대부분 영지에서만 지냈고, 수도에 올라와 본 것은 손으로 꼽을 정도에요.
거기다 와서 딱히 사람들의 환영을 받지도 못했으니 좋은 추억은 거의 없는 것 같네요.
아니 그다지 좋지 않은 추억만 잔뜩 있어요.”
그녀의 부친이 수도에 머무르는 동안 펼쳐왔던 애정 행각은 세월이 한참 지난 지금도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릴 정도이다.
그런 남자의 딸이 이곳에 왔을 때, 사람들이 어떤 말들을 수근대었을 지 묻지 않아도 충분히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도 멋진 도시였어요. 비록 사람들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요.”
“가슴이 아프신가 보군요.”
“그런 것과는 조금 달라요. 뭔지 끝나야 할 것이 끝났다는 기분이랄까?
아무리 아름다운 꽃도 언젠가는 져 버리잖아요?
네메아가 이렇게 형편없이 되 버린 것은, 그 아름다운 궁전과 멋진 도시 때문인지도 몰라요.
사실은 퇴락해서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으면서도, 이 아름다운 도시만 보면 마치 대단한 것을 지니고 있는 것처럼 여겨졌으니 말이에요.”
“마치 잘 되었다는 말처럼 들리는 군요.”
“어떤 면에서는요. 새로운 제국에는 새로운 궁전이 필요하겠죠.”
“황자 전하를 위해 새로운 네메아를 위해 가장 화려하고 아름다운 궁전을 지어드릴 겁니다.”
“그래요. 백작님은 남들이 상상할 수 없는 멋진 궁전을 지으실 거예요.
새로운 제국을 만들어 가시는 분 답게 말이죠.”
공녀는 말을 하다 말고 나를 돌아보았다.
“황자 전하께서 전하시라는 말씀이 있어요.”
“말씀하십시오.”
“황자 전하는…”
공녀는 말을 하다 말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우리 주변에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하고 입을 열었다.

“클라우디아는 이 네메아의 모든 왕들이 사라져 버리기를 원해요.
왕들도 왕비도 그리고 모든 왕족들도요.”
“그분의 원한은 단지 킬키스에게만 향해 있지 않는군요.”
“원한 따위가 아니에요.”
공녀는 내 말을 강하게 부정했다.
“새로운 세상을 만드는데 가장 방해가 되는 자들이에요.
그자들은 자신들의 왕위를 지키기 위해 오직 서로의 피가 흐른 이들만이 그 자리에 오를 수 있다는 규칙을 만들고 천 년이 넘도록 지켜오고 있어요.
그들은 오로지 자신의 소유한 것을 지키려고 할 뿐이죠. 이렇게 새로운 세상이 왔는데도 말이에요.”
“새로운 제국이 아니라 새로운 세상이로군요.”
“네. 맞아요. 백작님이 만들고 계시는 세상은 저도 아직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세상임에 틀림 없어요.”
난 단순히 강력한 네메아 제국을 만들어 클라우디아에게 안겨줄 생각이라 말하려다가 입을 열지 않았다.
“클라우디아는 황제 따위 아무런 관심도 없어요.
그저 그녀를 고통스럽게 만든 그자들에게 합당한 처벌을 내려주면 충분해요.”
“그런가요?”
어째서 이 소녀는 이런 말을 하는 걸까?
난 천천히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보기로 했다.

“그리고 백작님이 만들어갈 새로운 세상을 보고 싶어해요.
그건 저도 마찬가지이고요.
아마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그런 세상일 거예요.”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고 계시는 거죠?
전 그저 이제 막 저쪽세계에서 끌려온 사람일 뿐입니다.
그리고 우리처럼 이곳에 끌려온 사람들은 수도 없이 많았지요.
그들 모두 이 세계에 어느 정도 변화를 주었지만, 정말로 세상을 바꾸어 놓지는 못했습니다.”
이곳에서 인간의 힘은 대단하다. 마법을 익혀 천지를 뒤집고, 밀리언들은 칼 한 자루를 들고 드래곤과 싸운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거기가 한계이다.
수많은 다른 세상에서 지성체들을 이곳에 끌고온 그 미지의 힘 앞에 인간은 그저 벌레처럼 무력하다.
이곳 아크네시아에는 제일의 법칙이 있다.
싸우고 투쟁하다 죽어버린다.
“저도 알아요. 우리 네메아 사람들도 천 년 전에 이곳에 끌려왔잖아요.
하지만 백작님은 달라요.”
“그렇게 믿어주시니 고맙군요.”
이날 난 벌써 두 번이나 믿는다는 소리를 들었고, 아마도 그녀의 아버지가 한 말과 아그니스가 한 말은 전혀 다른 의미일 것이다.
“백작님이 되세요. 새로운 세상의 주인.”
공녀가 말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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